[천자 칼럼] 일본의 고구려 마을

입력 2017-09-20 18:15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일본 도쿄에서 70㎞ 떨어진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는 ‘고구려(高句麗) 마을’로 불린다. 기차역 이름부터 ‘고마(高麗·고려)역’과 ‘고마가와(高麗川·고려천)역’이다. 고려(高麗)는 일본에서 고구려를 뜻하는 말로 ‘고마(こま)’ 또는 ‘고쿠리(こうくり)’라고 발음한다. 고려 왕조는 ‘고라이(こうらい)’로 구분해 부른다.

이 일대의 지명과 성(姓)·학교·기업은 물론이고 신사 이름에도 ‘고려’가 붙어 있다. 고마진자(高麗神社·고려신사)는 고구려 멸망 후 일본에 정착한 유민들이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 고약광(일본명 고마노잣코·高麗若光)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고약광은 666년 외교사절로 파견됐다가 패망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남았다.

고대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따르면 그는 703년 왕성(王姓)을 받고 716년 고구려 유민 1799명을 모아 고마군(高麗郡)을 창설했다. 지난해에는 재일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신사 입구에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三足烏·세 발 달린 까마귀)를 새긴 ‘고마군 창설 13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궁사(宮司·신사 책임자)는 약광의 60대 후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가 맡고 있다.

신사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말미에 “고마 다이스키, 니혼 다이스키, 강코쿠 다이스키(고마가 좋다, 일본이 좋다, 한국이 좋다)!”라고 외치곤 한다. 고구려 유민의 흔적은 중국 랴오양(遼陽)과 윈난(雲南), 몽골 ‘고올리·고리(고구려) 산성(山城)’, 태국 치앙라이 등에도 있지만 이곳만큼 뿌리가 깊은 곳은 드물다.

고려군이 설치된 지 42년 뒤엔 인근에 신라군이 생겼다. 규슈에는 백제마을 난고손(南村)이 있다. 오사카(大阪)의 백제주(百濟洲)를 가리키는 일본어 ‘구다라스(くだらす)’는 백제 고어(古語) ‘구다라(큰 나라)’에서 유래했다. 부여의 ‘구두레’라는 지명과 맞닿는다. 구마모토(熊本)와 공주의 옛 이름 웅진(熊津)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백제 무령왕(501∼523 재위)의 자손인 내 몸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했다. 내년 퇴위를 앞둔 그가 어제 고마(高麗)신사를 참배했다.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한반도를 상징하는 신사를 방문해 과거사 반성과 화해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19세기 행정구역 개편 때 바뀐 지금의 히다카(日高)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한국과 일본이 공존한다.

언젠가는 한·일 정상이 이곳에서 만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일제 강점기의 아픔만 따지면 ‘가깝고도 먼’ 이웃이지만, 유구한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가깝고도 가까운’ 게 두 나라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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